파 조
경원군파(慶原君派)
파조(派祖) 이반계(李攀桂, ? - 1392) 호(號)는 송헌(松軒)이며 작위(爵位)는 경원군(慶原君)이고 시호(諡號)는 충절(忠節)이다.
고려시대 말기,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文臣)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절의(節義)를 지켰다.
고려왕조에서 예부상서(禮部尙書)(조선시대의 예조판서에 해당)를 지냈고, 조선왕조에서 태종 이방원이 그의 절개를 높이 사서 영의정을 추증(사후 작위나 벼슬을 내리는 일)하였다.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의 문인(門人)이다.
운곡 원천석과는 친구사이이며, 예부상서(禮部尙書) 시절(時節)에는 이방원을 제자로 가르쳤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여러 벼슬을 지내고 전의교위(殿毅校尉), 신호위영중랑장(神虎衛嶺中郞將)과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역임(歷任)하였다.
1392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공양왕(恭讓王)을 몰아내고 조선(朝鮮)을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운곡 원천석과 함께 강원도 원주 사전리 치악산에 은거하며 고려의 운이 다하고 이씨의 세상이 됨에 차라리 굶어죽을지라도 “이씨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후 단식 7일 만에 죽으니 후에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이 그의 절의(節義)를 가상히 여겨 경원군(慶原君)에 추봉(追封)하고 증직(贈職)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하였다.
경현사(景賢祠)에 배향(配享)되었고 충절(忠節)의 시호(諡號)가 추서(追敍)되었다.
강릉공파(江陵公派)
파조(派祖) 이영화(李英華)[1430~1517]는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한 뒤 투필첩호방(投筆捷虎榜)으로 무과(武科)에도 뽑혀 감역(監役)을 역임(歷任)하였다.
이후 직산현감(稷山縣監)과 홍산현감(鴻山縣監)을 거쳐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를 역임(歷任)하던 중 1453년(단종 원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켜 우의정(右議政) 김종서(金宗瑞) 등 반대파를 살해하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염려하여 지금의 해남군 마산면 산막리로 피신해 정착하였다.
해남의 공(公)의 후손(後孫)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9명의 충신과 3대에 걸쳐 효자(孝子)를 배출(輩出)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장(李樟), 이남(李楠), 이원해(李元海), 이홍신(李弘信), 이지훈(李之訓), 이계정(李繼鄭) 등을 들 수 있다.
이영화는 맹건(孟健). 충건(忠健). 인건(仁健). 의건(李義健). 예건(禮健). 지건(智健) 등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해남으로 내려오지 않은 충건을 제외한 다섯 아들이 해남 근교에 흩어져 세거(世居)하면서 해남 지역 원주이씨의 기틀을 다졌다.
1991년 원주이씨대동보 발간 때 영화(英華)의 조부(祖父)이신 을계(乙桂)로 상계하여 파조(派祖)로 삼았다.
판도공파(版圖公派)
파조(派祖)는 이천명(李天明)이며 자헌대부(資憲大夫)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