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조
신라(新羅) 개국공신(開國功臣) 아찬공(阿餐公) 휘(諱)알평(謁平)은 유리왕(儒理王 9) 서기(西紀) 32년 나라로 부터 이씨(李氏)로 성(姓)을 받으므로 우리 이씨(李氏)의 원조(元祖)가 되었다.
그로부터 천년(千年)후 원대손(遠代孫) 휘(諱)신우(申佑)는 고려목종(高麗穆宗)때 원주(原州)에서 일어나 관(貫)을 원주(原州)로 분적(分籍) 하셨는데 선계(先系)의 기록(記錄)이 없는 것은 고증(攷證)할 수 있는 문헌(文獻)이 없기 때문이다.
그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전쟁(戰爭)이 심(甚)하여 민족(民族)의 흥망성쇠(興亡盛衰)의 변화(變化)가 잦아 나라의 역사(歷史)도 완전(完全)치 못한데 더구나 성씨(姓氏)의 족보(族譜)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옛날 경주보(慶州譜)에는 아찬공(阿餐公)으로부터 소판공(蘇判公)까지의 중간(中間)에서 계통(系統)을 잃었으므로 소판공(蘇判公)을 알평(閼平)의 원대손(遠代孫)으로 하여 시조(始祖)로 모신 것과 우리 시조(始祖) 경흥군(慶興君) 선계(先系)가 무징(無徵)하므로 휘(諱)알평(謁平)의 원대손(遠代孫)으로 하여 시조(始祖)로 모신 사례(事例)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찬공(阿餐公)을 득성(得姓)의 원조(元祖)로 삼고 경흥군(慶興君)을 분적관조(分籍寬祖)로 하는 것이다.
시조(始祖) 경흥군(慶興君)으로 부터 찬성공(贊成公)까지 12대(代)간의 자휘작질(字諱爵秩)이 분명하고 계세(系世)가 훤혁(煊爀) 하였으니 명가(名家) 구승보(久乘譜)에 결의(缺疑)가 없다. 그런데 경주이씨(慶州李氏) 무진보(戊辰譜 1747년)를 출간(出刊)할 때 우리의 본계(本系)는 관(貫)을 원주(原州)로 쓰므로 인(因)해 입적(入籍)이 거부(拒否)되었고 11세손(世孫) 지수(之秀)의 후손(後孫)은 실계(失系)하였다가 잉관경주(仍貫慶州)하고 전보(前譜)에 들어갈 때 시조(始祖) 경흥군(慶興君)을 소판공(蘇判公) 12세손(世孫) 현복씨(玄福氏) 아래에 계차(系次)해 놓았는데 이는 고증(攷證)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어느 이유(理由)도 맞지 않는 것이다.
경흥군(慶興君)은 즉 소판공(蘇判公) 3세(世) 금서씨(金書氏)의 외증손서(外曾孫婿)인데 어찌 금서씨(金書氏)의 8대손(代孫) 현복씨(玄福氏) 아래에 계차(系次)할수 없다는 사실(事實)을 우리 신축보(辛丑譜 1781년), 병술보(丙戌譜 1826년), 경오보(庚午譜 1870년)에서 명백(明白)하게 천명(闡明)하였다.
이와같이 오류(誤謬)가 있으므로 우리 이씨(李氏)는 지금까지의 각세보(各世譜)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始祖) 소판공(蘇判公)에서부터 12세손(世孫) 현복(玄福) 까지를 산거(刪去)하고 경흥군(慶興君)을 이알평(李謁平) 원대손(遠代孫)으로하여 신미대동보(辛未大同譜 1991년)에 산정기록(刪定記錄)한 것이다.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 위치한 시조재단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