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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권(李允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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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최고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3-29 08:40 조회2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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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록(碑文錄)

참의공 윤권 묘비문(參議公允權墓碑文)

()의 휘()는 윤권(允權)이요 자()는 평숙(平叔)이며 성()은 이씨(李氏)인데 관()은 원주이다, 원 시조(始祖)응 신라개국(新羅開國) 좌명공신(佐命功臣) ()알평(謁平)이며 원주(原州)로 분관(分貫)한 휘()신우(申佑)23세손(世孫)이다. 또한 강상(綱常)을 밝히고 충절(忠節)을 지키신 경원군(慶原君) ()반계(攀桂)11대손(代孫)이다, 대제학(大提學) 문효공(文孝公) ()()는 근세(近世) 현조(顯祖)이며 고조(高祖)는 상장군(上將軍) 무열공(武烈公) ()종호(種毫)요 증조(曾祖)는 현감(縣監) ()세화(世華)이며 조()는 군수(郡守) ()() ()는 공조참의(工曹參議) ()사경(思卿)이다. ()는 숙부인(淑夫人) 경주설씨(慶州偰氏)는 생원(生員) ()의 여()3남을 낳았으니 공()이 장()이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윤기(允機)는 중()이며 생원(生員)으로 고향(故鄕) 진수(鎭守)를 지낸 휘()윤정(輪定)이 계()이다. ()은 천품(天稟)이 정수단아(精秀端雅)하여 학문(學問)을 가까이하니 경사(經史)에 밝고 천리(踐履)가 무거워 사우(師友)들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목릉선묘(穆陵宣廟)에 출사(出仕),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를 거쳐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歷任)할 때 제행(制行)이 명정(明正)하여 현칭(見稱)하였는데 이때 당론(黨論)이 분운(紛紜)하니 환향임천(還鄕林泉)하여 불구명리(不求名利)하고 은거양지(隱居養志)하니 돌이켜 생각해도 공()의 출처진퇴(出處進退)는 그 시의(時宜)에 부합(符合)했고 도학배리(道學排理)는 평생(平生)의 실공(實功)이었음을 능히 짐작(斟酌)하리라. 성도관후(性度寬厚)하여 대인접물(待人接物)에 현우오악(賢愚五惡)이 없고 가세부윤(家勢富潤)하여 인근(隣近) 빈핍(貧乏)에 구휼시혜(救恤施惠)하였으며 봉선사친(奉先事親)에 성효(誠孝)가 지극(至極)하고 어가교자(御家敎子)에 법도(法度)가 유별(有別)하여 종족(宗族)이 감화(感化)하고 향방(鄕坊)이 흠복(欽服)하였으니 진실(眞實)로 이와같은 온양공겸(溫良恭謙)과 효우독행(孝友篤行)은 오직 원주이문(原州李門)의 규범(規範)에 그치지 않고 당시 사림(士林)의 의표(儀表)가 되었다. 생졸년은 미상이다. ()는 창녕조씨(昌寧曺氏)니 목사(牧使) 상험(尙險)의 여()로 묘()는 월산면(月山面) 월중리(月中里)임좌(壬坐) 원에 건위(乾位)와 합폄(合窆)하고 계배(繼配) 숙부인(淑夫人) 영천최씨(永川崔氏)는 선전관(宣傳官) ()의 여()로 가산리(佳山里) 증산(甑山) 묘좌(卯坐)에 별장(別葬)했다. 소생(所生)2남이니 장()은 술() ()는 원()이다. 손증(孫曾)은 기록하지 않는다. ! ()의 적덕여경(積德餘慶)으로 후승(後承)이 번연(繁衍)하고 활로가 항상 빛나니 어찌 그 음덕(蔭德)에 감읍(感泣)하지 않으랴, ()이 가신지 300여 년간 묘()앞에 현각(顯刻)이 없어 후손의 재한(齎恨)이 컸는데 오늘에야 추원(追遠)의 정과 보본(報本)의 성()의로 작은 정민(貞珉)에 그 업적(業績)을 기록하여 후대(後代)에 영원히 전하고자 함이니 비록 만시지감(晩時之感)이 없지 않으나 이도 또한 영령(英靈)을 봉위(奉慰)한 일도(一道)가 되리라 믿는다. 이에 명()하니 공()이여 경원군(慶原君)의 화예(華裔)로 경학(經學)에 밝으셨고 퇴휴(退休)하여 한일(閑逸)하니 기른 뜻이 고상(高尙)하네, ()을 쌓은 여경(餘慶)으로 그 운잉대창(雲仍大昌)한데 보아하니 저 송백(松柏)은 고객만 찬연하다.

단기 4323년 신미 월 일,

11대손(代孫) 창환(昌煥) 근찬(謹撰), 여산(礪山)후인(后人) 송태경(松台炅)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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